마음으로만 늘 가보았던 그곳 선자령, 진종일 안개 자욱한 초록 숲길을 걸었다.
숲길에서 안개비를 만나기도 드물지만,마음 먹고 찾아나선 선자령 안개비라 내겐 새로웠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삽시간의 현상이 아니라 걷는 내내 숲 속 깊게 배여 황홀케 했다.
몽환적이고도 아름다워 한 편의 서정시처럼 가슴에 깊게 스며들었다.
야릇하구나, 안개 속을 거닐음은!
모든 숲과 돌은 외롭고,
나무도 서로를 몰라 보며
각자는 홀로 있네.
나의 밝은 어린 시절엔
세상은 친구로 가득했는데,
안개가 깔린 지금
어느 누구도 보이지 않구나.
모든 것으로부터 조용히
자신을 떼어 놓는
어둠을 모르는 자는
진실로 어느 누구도 현명치 않으리.
야릇하구나, 안개 속을 거닐음은!
인생은 고독한 것.
어느 누구도 서로를 알지 못하고
각자는 홀로 있네. 안개 속에서 /헤르만 헷세
전날 주차와 등산로 입구를 확인하지 않았다면 지독한 안개에 갇혀 꼼짝도 못했을 것이다.
선자령 순환로 입구에서 안개숲으로 발자국을 옮긴 시간이 여섯시 반,
쉬 들어설 수 없는 기운으로 신비한 무엇이 숨어 있을 듯한 초록숲은 안개찬가라도 불러야 했다.
안개 숨을 쉬고 있는 초록 풀들이
초록빛깔 진하게 옷입은 이름모를 나무들과 어우러져 몽환의 시를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 안개숲이 안겨주는 초록의 생명성은 어떤 힘과 같은 울림이였다.
그 정경에 황홀해하면서 ,
행복에 이르는 길을 걷는 양 전혀 바쁘지 않은 걸음으로 분주히 셔터를 눌렀다.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하늘 높이 야심차게 뻗어 있다.
안개 낀 숲에서 초록향기 날리며
마치 나무들이 이야기를 하듯 서로 어우려져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꿈 속에서 본 곳인 듯 어디선가 본 거 같은 느낌이 들고 친밀해
꿈인양 펼쳐지는 숲 속 정경에 금새 익숙해진다.
안개비 내리는 날에도
어딘가 숨어 지지배배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새들에게 관대한 나무는 어떤 나무일까
소나무일까 ,참나무일까 ,향나무일까,전나무일까 , 나무 이름을 묻자
우리 둘 외엔 걷는 이 없어 천천히 동행하면서 알려주더니
사진을 찍으며 느리게 걷는 내 행보가 답답한지 저만치 앞서 걷는다.
비우면 채워진다 ? 멈추면 보인다? 중요한 것은 비우기전에 아우르고 ,머무르기전에 체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길을 걸으면서 길을 만나고, 숲에서 숲을 만난다.
나의 시선과 마음이 같을 때 진정 채워지기도 하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숲 속에 잠겨 있는 몽환의 안개가 넘실거리며 추억따라 피어오르면서
내 것의 시간 밖에서 함께 나누기를 열망하던 시절들이 안개 등처럼 깜박거렸다.
기억 저편 먼 곳으로부터 내 마음 푸른 웃음 띤 풀빛이 되어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야윈 어깨를 다독여주던 그 시절 그 향기가 절로 교차했다.
가지 끝에서 푸르름 날리며 투명하게 빛나는 새순 같은 생명체 , 순수의 시대였으리라.
어디만큼 ,얼마쯤 걸었을까, 출발한지 두시간 반정도 ,갑자기 펼쳐진 정경에 압도당했다.
안개 숲에 자작나무라니 , 하얀 몸피 자작나무가 초록 숲에서 선연하게 반짝인다.
안개일 수 밖에 없는 안개 숲에서
하얗게 도드라지는 자작나무를 만나려고 그렇게 고단한 길을 걸었나 싶을 정도로 기쁘다.
자작나무 숲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숲은 보물을 감추어두었다가 지친 내게 선물을 내민 셈인 것이다.
초록빛과 안개 그늘 속에서 하얀 자작나무가 포착된 긴장은 참으로 가슴 떨렸다.
빼곡하게 밀집된 역광의 자작나무 검푸른 잎사귀에서 ,
시간은 역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생뚱맞게 연결되어 비쳐진다.
회색빛 담뿍 내려앉은 하늘 쳐다보며 나만의 은유를 조용히 안았다.
여느 산과는 달리 선자령은 순환으로 걷는 길이지만 백두대간 선자령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곳이 정상이다.
대관령양떼목장입구에서 아침 여섯시 반에 출발하여 표지석이 세워진 곳에 도착한 시간이 12시10분이다.
그야말로 유유자적 안개비와 초록숲에 젖어 걷다가 쉬다가, 쉬다가 걷다가를 반복한 셈이다.
출발한지 두시간정도 걷던 시점에서 , 어떤 부부 등산객에게 얼마쯤가야 선자령 정상인지 물으니 많이많이 남았다고 하면서
그 속도로 걷는다면 하루종일 걸을 것이라고는 했다.
먹을 것 염려하면서 초코렛까지 챙겨주어 보답하고자 하니 산길 인심이라 했다.
사라질 생각조차 없는 안개는 선자령 정상마저 점령하고 있다.
선자령 푸른 능선을 타고 휘돌아 감기는 하얀 운해와 바람 불러모으는 풍력발전기는 안개비에 그 모습 안개를 닮았다.
안개비 젖은 초록숲이 만들어 내는 표정과 소리를 느끼면서 능선따라 내려오는 길은 확트인 초지가 드문드문 나타나곤 했다.
양떼목장쪽으로 들어섰기에 반대편 등산로 능선길 임도따라 걷게된 것이다.
아름다운 숲속 정경에 비해 운치가 덜하지만 푸른 초지에 노랗게 자잘자잘 피어난 야생화를 보는 즐거움이 있다.
몇시간 걷다보니 애정이 깃든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왕복 세시간이면 된다는 정보를 믿고 먹을 것을 시원찮게 챙겨와 배는 고팠지만
자연의 순수함에 몰입되어 아직은 더 걸을양으로 생생했다.
누군가 혼자 안개 속 순례자가 되어 정상을 향해 오던 길로 걸어갔다.
스쳐지나는 안개바람 사이로 자연을 통해 얻어지는 소박한 깨달음이 물씬거렸다.
선자령, 그곳에 가면 야생화 지천으로 피어나 천상의 화원을 만날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이름이 주는 정취를 떠올리며 무리지어 피어 하늘거리는 군락지가 없나 안개 자욱한 숲을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다.
넓게 군락지를 이루며 피어난 꽃밭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숲길따라 자잘자잘 피어난 야생화들이 걷는 내내 미소를 보내곤 했다.
풀숲에 피어나 방울방울 달린 은방울꽃은 초롱한 소리를 들려주고 ,
하얀 별들이 내려왔는지 향기를 다하여 피어난 애기나리는 순진무구한 아기미소로 화답했다.
생김새 궁금했던 민백미꽃은 호흡을 가다듬고 몇번이고 셔터를 눌렀다.
앞서 걸으며 분홍앵초꽃을 발견해놓고 ,
무슨 보물인양 내게 인계해주던 남편의 작은 배려마저 향기로운 미소를 짓게했다.
그밖에도 여러 종류의 야생화들이 이름값을 하려는 듯 천상의 초록숲에서 향기로운 연주로 오월의 숲을 찬양했다.
시멘트 포장도로 접어드니 발길에 힘이 부쳐 다시 숲길로 들어섰다.
천상의 화원이라 불리는 선자령에서 ,
초록숲 촉감을 충만하게 느끼며, 풀숲 야생화들과 아름다운 대화를 나누며,
안개 숲의 풍광을 가슴가슴 채우며 환상에 젖어 걸었다.
세시간도 버겁다고 염려한 길을 장장 8시간을 넘기고 9홉시간이 소요된 오후 세시가 넘었으니까
느림의 미학을 즐기기엔 다소 넘친 시간이다.
내 마음을 적셔주던 안개 숲에 취해 걷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여느 산행길과는 달리 둘레길처럼 이어져 완만한 곡선이 아름다운 숲길이다.
안개숲이라 그랬을까, 선자령만이 간직한 숲의 정취를 일찌기 그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다.
2012 0528 선자령
'시간의 흔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떼목장 초여름 풍경 (0) | 2012.06.05 |
---|---|
유월의 장미 (0) | 2012.06.04 |
길상사 연등 , 그대로 풍경이 되다. (0) | 2012.05.25 |
아카시아꽃 향기로운 오월에 .. (0) | 2012.05.21 |
유채꽃 핀 꽂지해수욕장 (0) | 2012.05.15 |